무타구치 렌야의 등장
전 글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무타구치 렌야는 버마(당시 미얀마)에 부임하자마자 임팔로 진격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임팔은 지금의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2차 대전 당시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 지점이 공략되면 교착국면에 있는 중일전쟁에 전황을 타개할 수 있게 되고 동시에 인도를 점령한 영국을 강력하게 압박할 수 있는 지정학 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일단 임팔을 점령하면 인도 내부의 영국군을 공격할 수 있게 되고, 인도에서 영국이 사라지면 동남아 지역에 있던 일본의 식민지에 대한 압박을 상당히 해소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지도자 중 하나인 찬드라 보세와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인도의 무장 독립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일본은 무타구치 렌야의 부임 전인 1942년부터 임팔을 공략하여 연합군의 중국 대륙 보급로를 끊고 이후를 도모하는 작전을 검토하기 시작했었습니다. 하지만 버마에서 임팔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험악한 아라칸 산악과 정글을 뚫어야만 했다는 점과 당시 일본군의 버마 방위도 안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당시 작전은 실행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무타구치 렌야는 1942년에는 이 작전을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1942년이나 무타구치 렌야가 임팔로 부대를 진격시킨 1944년이나 임팔 작전이 높은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작전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는 만큼 일본군은 전력이 소모되어 1942년 보다 더욱 난이도는 높아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인지 무타구치 렌야는 등장하자마자 임팔로 진격하여 영국군을 몰아내고 전황을 일거에 뒤집겠다는 이 모험적인 작전을 발악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임팔 작전의 입안
그리하여 임팔 작전이 입안되고 작전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실 무타구치 렌야가 버마 방면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것까지는 어느 조직에서나 있을 법한, 능력은 없이 자기 보신에 충실한 인물이 성공하는 스토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임팔 작전을 따로 분리하여 다루기가 충분한 이유는 무타구치의 부임 이후에 벌어진, 전쟁에 대한 기본 상식을 무시하는 작전이 입안되고, 진행이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전쟁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 일반적인 상식을 무시하는 작전이 실제로 시행되었고, 그 결과 5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죽고, 버마의 방어가 극도로 약화되어 연합군의 후속 공격에 일본이 이 지역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보급 문제
어쨌거나, 임팔 작전은 입안 단계에서부터 심각한 반대에 직면한 작전이었습니다. 버마에서 임팔까지 진격하여 인도의 북동부 아삼 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아라칸 산맥이라는 험준한 산맥과 정글 지대를 지나야 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완전한 자연 상태로 도로라고는 비포장 도로가 고작이었고, 경로에 있는 친드윈 강은 부대가 지날 다리조차 없었습니다.
진격이 어렵다는 것은 당연한 문제였고, 진정한 문제는 보급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5만 가량의 병력이 진격하는 대규모 작전에 보급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심각한데, 진격하는 지역이 하필이면 인간이 생존하는 것부터 험준한 산맥과 정글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재앙이 될 수 있는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일본군에도 제정신인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서 분명히 반대의견이 강하게 나왔습니다. 하지만 무타구치 렌야는 그의 유명한 어록을 남기며 이 의견을 묵살하고 맙니다.
일본인은 본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의 풀을 먹으며 진격하면 된다.
술자리의 장난으로 말을 해도 심각한 문제가 될 발언인데, 수만 장병의 생사가 걸린 작전의 지휘관이 보급 문제를 이렇게 취급했다는 것은 이미 작전 실패로 보아도 무방할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임팔 작전이 개시될 당시 작전 기간은 15일로 예상되었는데, 그 이유가 보병이 들 수 있는 식량이 15일이 한계라는 이유였습니다.
공중 병력의 부족
2차 대전의 가장 큰 변화중 하나는 1차 대전에서 전쟁병기로 가능성을 입증한 비행기가 전장의 주역으로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항공지원의 효용성은 이미 증명되어 있었고, 연합군은 대부분의 전역에서 가능한 병과를 이 유기적으로 협동하여 입체적인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버마 북부에서 일본군을 견제하던 영국 군의 주요 투입로 및 보급로는 항공기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전 말의 일본은 이미 공업력의 부족으로 항공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가장 강한 적국인 미국을 상대하는 태평양 전역이 1순위라 있는 병력조차 버마 쪽으로 돌리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무타구치는 정글에서는 시야를 확보할 수 없으므로 비행기는 필요 없음.이라는 심플하고 1차원적인 논리로 이 문제를 무시해 버립니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영국군의 주요 보급로가 공중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습니다. 비극으로 끝난 임팔작전은 이렇게 시작부터 잘못된 작전이었습니다.
3편 임팔 작전의 시작으로 이어집니다.